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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 립싱크 가수의 발언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아티스트로 보아주세요."

립싱크를 '예술'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기술'로 보아야 할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이 발언이 분명히 일깨워주는 바가 있다. 적어도 당시의 가수들은 상품을 양산할망정, '예술가'가 되기를 소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예술'과 '상품'을 둘러싼 논쟁은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수가 얼마나 많은 음반을 팔고 영화가 얼마나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가다. 특히 외국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연예사업가'가 문화예술계의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미국 본토'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청와대는 가수 비의 미국진출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홍보사례로 소개하기도 했다. (어떤 언론은 이를 비가 '미국정벌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브리핑>은 "인기가수 '비'가 뉴욕에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홍보자료에서 <조선일보> 인터뷰 내용을 인용한다. 이에 따르면 미국 진출은 "아시아 시장을 다 먹기 위해"서다.

"비는 아시아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굳이 미국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박진영: 역설적이지만 아시아 시장을 계속 잡기 위한 것이다.… 미국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성공해야 '아시아 공인 1등'으로 자리를 굳힐 수 있다. 거대한 인구를 지닌 아시아 시장을 다 먹기 위해 미국 진출이 필수다." (<조선일보> 2006년 2월 11일/ 청와대 브리핑 2006년 4월 13일, "인기가수 '비'가 뉴욕에 간 까닭은?")


'미국 진출'에 담긴 백인우월주의 이데올로기

미국은 다인종·다문화국가이며, 이 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비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의 뉴욕 공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는 객석을 가득 메운 팬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그중 한 명을 골라 선물 주었다. 이때 그는 좀 독특한 선택을 했고, <뉴욕타임즈>는 이 사실에 주목했다.

"관객은 대략 95퍼센트가 아시아계였고, 그 가운데 최소한 90퍼센트가 여성들로, 언제라도 소리칠 준비가 된 듯 보였다…. 비는 이렇게 선언했다. '외로워요.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말한 그는 관객들 가운데 젊은 여자 한 명을 무대 위로 불러 냈다. 그리고 장미꽃다발과 곰인형을 건네고 가볍게 그녀를 안았다." (<뉴욕타임즈> 2006년 2월 4일, "미소 띤 한국 인기가수, '나 외로워요'")

<뉴욕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가 골라낸 사람은 동양계가 아닌 소수의 관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비와 기획사로서는 '미국진출'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그림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아시아계 미국인과 그를 보기 위해 미국까지 찾아온 팬들을 배제하고 금발의 백인을 고르는 결과로 나타났다.

심형래 감독 역시 미국의 (백인) 배우가 "한국의 전설"이라는 대사를 말할 때 눈물을 쏟았다고 말한 바 있다. 일부 관객은 <디워>가 '애국심 마케팅에 의존한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가 진심으로 미국 속에 한국을 심고 싶어한다고 믿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듯 말이다. 우리가 늘 먹는 김치도 미국인들이 '원더풀'하면 더 좋은 음식이 된다.) 왜 꼭 그래야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심형래 감독의 강박에 가까운 소망은 조선시대의 왕자와 공주를 500년 후 로스앤젤레스의 백인 남녀로 환생시킨다. 비가 백인 여자를 안는 것으로 표출되었던 '미국 진출의 꿈'이 <디워>에서는 백인으로 태어나는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진출하고 싶은 것은 '미국시장'이라기 보다는 '백인의 마음'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열정'은 언제나 순수한가

▲ <디워> 할리우드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는 심형래 감독.
ⓒ 영구아트
비의 옛 기획사 대표인 박진영은 '아시아 시장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진출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미국진출 노력이 반드시 전략적 선택만은 아닌 듯하다. 그 역시 심형래 감독과 같이 "미국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개인적 열정을 드러낸 바 있다. 국내에서는 이 '열정'만으로도 후한 점수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진출지'의 평가는 좀 더 가혹하기 마련이다.

"박진영은 비가 의상을 갈아입는 동안 거듭해서 무대로 나왔다. 그는 힙합 스타일의 영어로, 비가 부른 노래를 모두 자신이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숀 콤스(디디)와 10대 가수인 조조를 불러내어 비를 칭찬하게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1990년 중반에 발표했다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박진영이 최신곡을 비에게 부르게 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뉴욕타임즈> 2006년 2월 4일, "미소 띤 한국 인기가수, '나 외로워요'")

심형래 감독은 <용가리> 시절부터 '우리도 할리우드 수준의 특수효과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욕망을 피력해 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열정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관객들은 익숙한 한국 풍경이 나오고, 액션장면이 '할리우드 뺨친다'는 사실만으로 매력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미국관객들은 오직 이 점만으로 극장을 찾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라이어티>지의 데렉 엘리 기자의 평가는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디워>의 특수효과에 대한 집착이 영화 전체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올 2월 9일자 기사에서 <디워>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비디오용 컬트영화가 될 것 같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디워>는 오직 (특수효과)기술에 대한 관심 하나만 가지고 미국과 세계시장을 뚫으려 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극중인물과 그들을 통한 이야기 전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쩌면 심형래 감독의 열정은 소박한 편이었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영화는 이렇게 감독을 대신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용가리>를 보며 모두가 실패라고 욕했습니다. 하지만 <용가리>는 엄청난 일을 해 냈습니다."

그가 말하는 '엄청난 일'이란 '<용가리>가 미국의 비디오 가게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디워>가 '올 여름 최악의 영화 가운데 하나'라는 극단적인 평가에도 심형래 감독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면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인 <스파이더맨3>와 <트랜스포머>와 더불어라면."

<용가리>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는 <디워>

<디워>에 대한 <버라이어티>지의 평가가 가혹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이 비판은 여러모로 곱씹어 볼 만하다. 흥미롭게도 이 미국의 연예지는 심형래 감독이 참고해야 할 영화로 다른 할리우드 액션영화 대신 한국의 <괴물>을 꼽는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보여준 한미관계의 절묘한 아이러니를 왜 영화 속에 집어넣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디워> 이후 현란한 시각효과를 갖춘 할리우드식 영화가 한국영화의 미래처럼 논의되는 상황에서 <버라이어티>의 지적은 새겨들을만하다. 어쨌든 '진출지'로부터 온 견해가 아닌가.

컴퓨터 그래픽 처리가 좀 더 세련되었을망정, <디워>는 <용가리>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재치 없고 지루한 '기능적' 대사의 나열, 감독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은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 개연성('현실성'과 다르다)을 무시한 이야기 전개, 영화와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액션장면 등 <디워>는 특수효과 하나로 덮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 영화 <디워> 한 장면
ⓒ 영구아트
<용가리>의 가장 큰 문제가 특수효과가 아니었음에도, 심형래 감독의 관심사는 오로지 컴퓨터 그래픽을 개선하는 데 집중된 듯하다. <용가리>와 마찬가지로, <디워>역시 '시각효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영화가 '시각매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활용하지 못한다. 용의 전설과 주인공 남녀의 관계를 모두 지리한 대사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제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특수효과를 기다리며 이 부분을 견뎌내지만, 미국 관객들의 경우 상당수가 액션장면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리를 뜨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디워>는 한국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인 '로케 영화', 혹은 '할리우드' 상표를 붙여 역수입한 영화로 기능할 것이다.

벌어들이는 돈이 전부는 아니다

심형래와 '비'는 각기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계의 모델'로 환영 받은 바 있다. 심형래 감독은 '신지식인'의 칭호를 얻었고 '비'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의 홍보대사가 되었다. 두 정부가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껴안는 가운데 예술과 문화를 '수출산업'으로 육성했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후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문화가 '상품'이 된 시대지만, 영화와 음악의 가치가 오직 벌어들이는 돈에 의해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한국의 한 여가수를 좋아한다. 그녀는 그 흔한 해외공연 한 번 하지 않지만, 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세계적인 가수의 한 명으로 꼽는다. 세계적인 가수가 꼭 세계적인 명성을 누려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관객과 함께 호흡하면서 평생 사랑받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진출'하거나 '투자'한다고 해서 누구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명 잡지의 표지에 얼굴을 들이밀거나 외국의 흥행차트에 곡을 올린다고 저절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가수나 영화가 미국시장에서 관객들을 끌어 모으지 못한다고 해서 현지의 가수나 감독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한 사회와 문화권은 나름의 감수성과 취향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성공해야만 '진짜' 성공한 것이라는 생각은 한국이 오랫동안 품어 온 서구적 (정확히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과 더불어 문화적 취향 및 다양성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와 음악을 사업으로 이해하든 예술로 이해하든, '할리우드 지배'의 꿈을 품든 '빌보드 정벌'의 열정을 실천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다. '왜 저렇게 미국에 집착할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시도가 그들의 이름과 상품에 부가가치를 더해준다면 거기 반대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 '야심'과 '열정'을 '한국인'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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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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